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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의 강화도는 치욕의 병자호란을 기억하고 있다”
인천의 새로운 역사로 세계사를 바꾸자
 
이광종 기자 기사입력  2012/09/22 [00:43]


▲ 적의 침입을 피해 강화도로 피신하는 문제를 놓고 조선 조정의 신료들은 날카롭게 대립했다. 사진은 강화성의 성벽.   

 
[한국인권신문=한민족역사정책연구소장 황청호] 조선시대 인천 강화도에서 발생한 전란사상 중 가장 참담하고 비극적인 전쟁인 병자호란이 1636년 12월 9일에 발생한다. 고려시대 몽골과의 여몽전쟁, 그리고 임진왜란과 정묘호란에서도 굳세게 지켜내었던 강화도가 드디어 무너진다. 강화도가 이처럼 쉽게 무너져 내린 데에는 당시 조선을 알았던 청과 청을 전혀 몰랐던 조선이 처한 정치상황이 극명하게 말해준다. 청은 여몽전쟁이나 임진왜란과 정묘호란으로부터 조선의 모든 국내 상황을 정확히 알고 있었다. 하지만 조선은 명을 무너뜨리고 새롭게 신흥 강국으로 부상하는 청을 전혀 몰랐다. 아니 명에 대한 유교적 사대주의 사관에 알려고도 하지 않았다. 청은 12만의 병력을 거느리고 압록강을 건너 조선을 침략한다. 따라서 이렇게 무지한 조선은 병자호란을 맞아 청에게 일방적으로 몰리고 항복할 수밖에는 없었던 것이었다. 청을 몰랐던 조선의 왕족과 귀족들은 백성들을 버리고 남한산성과 강화도로 숨어 들어간다. 당시 청군은 조선이 상대하기에는 너무나도 힘겨운 강적이었다. 

청군은 병력의 수, 무기 체계, 전략과 전술, 군의 사기 등 모든 면에서 조선군을 압도하고 있었다. 그들은 명과의 전쟁을 통해 교전 경험도 또한 풍부했다. 청은 1618년 무순성(撫順城)을 점령했던 이래 수많은 공성전(攻城戰)의 전쟁경험을 갖고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공성전의 경험을 갖고 있었던 청은 1631년 청 태종 홍타이지가 주도했던 대릉하(大凌河) 공략전과 흡사한 남한산성 공성전을 시도한다. 대릉하전 당시 청군은 성을 물샐 틈 없이 포위하고, 산해관 쪽에서 몰려오는 명 지원군의 접근을 차단했었다. 청이 남한산성을 고립시키기 위해 판교와 광주 쪽에서 강화도와 삼남으로 이어지는 길을 차단했던 군사작전과 똑같다. 외부와의 모든 연결을 끊고 성 내부의 식량이나 연료가 떨어지는 정황을 정확히 파악하면서 수시로 투항을 권유하는 심리전을 폈던 것도 또한 비슷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전쟁을 시작하기 전 청이 이미 조선이 사용할 모든 카드를 간파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청은 조선 조정이 유사시 강화도로 숨어 들어갈 것이라는 점도 1627년 발생한 정묘호란의 경험을 통해 이미 알고 있었다. 청군은 그 때문에 서울을 신속히 점령하고 조선의 왕 인조를 사로잡는 것을 전략 목표로 삼았고, 그것을 달성하기 위해 조선군의 청야견벽 작전을 무시하고 서울로 치달리는 속전속결 전술을 구사했던 것이다. 이러한 모든 정황을 고려하면 병자호란 당시 조선이 저지른 실책이 무엇인지는 명확히 드러난다. 우선 오랫동안 외세의 침략에 대비하여 막대한 물력을 기울여 강화도를 정비했으면서도 정작 청군의 침입이 시작되자 강화도로 들어가지 못한 것은 명백한 실책이었다. 조선 관료들의 정치적 내분과 나태함이 드러난 것이다. 만약 인조와 조정이 청군의 전략을 미리 알고 강화도로 들어갔다면, 전쟁의 양상은 확연히 달라졌을 것이다. 우선 여몽전쟁에서 드러났듯이 해로를 통해 삼남 지방과 연결됨으로써 전란에 필요한 물자 조달이 훨씬 용이했을 것이다. 또한, 인조반정을 이끈 김경징 같은 용렬한 장수에게 강화도의 방어책임을 맡기지도 않았을 것이다. 또한, 군사력을 확보하기 위해 삼남 지역의 수군도 훨씬 효율적으로 활용할 수 있었을 것이다. 

당시 청의 배후에는 엄연히 명나라가 있었다. 청은 '뒤를 돌아보아야 할(後顧)위험' 때문에 속전속결 전술로 조선의 강화도를 점령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따라서 만일 인조가 강화도로 들어갔다면 조선은 더 많은 시간을 확보할 수 있었을 것이고, 청은 따라서 초조해질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러면 설사 청과의 강화(講和)를 맺더라도 훨씬 완화된 조건으로 화약을 체결할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역사에서 가정이란 부질없는 것이다. 

강화도로 들어가지 못하고 남한산성으로 내몰린 것은 결국 인조와 조선 조정의 실책이고 무지였다. 적은 나를 아는데, 나는 적을 모르고 거기에 안일하고 무사태평하기까지 했던 조선의 모든 정황이 불러온 필연적인 귀결이었다. 1623년 3월 김류가 이끄는 인조반정의 거사군이 창덕궁으로 들이닥쳤을 때 광해군의 부인 유씨는 반문했었다. "지금의 거사가 종사(宗社)의 미래를 위한 것인가? 아니면 그대들의 영달을 위한 것인가?" 반정세력은 거사가 성공하던 당일에는 그 뜻을 정말 잘 몰랐을 것이다. 서인들이 권력을 잡기 위해 일으킨 인조반정은 분명 나름대로 명분과 정당성이 있는 정변이었다고 볼 수도 있다. 인조반정의 주도 세력들이 광해군 집권기에 자행된 실정과 난맥상을 바로잡으려는 의지를 갖고 있었던 것도 인정할 수 있다. 하지만 거기까지가 모두 다였다. 인조반정공신들을 비롯한 주도 세력들은 집권 이후 자기 관리에 실패했다. 

인조반정 이후 등장하는 이괄의 난이 이를 증험한다. 광해군대의 부정과 비리를 모두 소리 높여 질타했으되, 자신들 또한 비슷한 잘못을 저지르고 있다는 사실은 그들은 전혀 깨닫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반정 이후 영달한 공신들 가운데 최명길과 이귀 정도를 빼면 나머지 사람들은 모두 무능하고 문제가 많았다. 나아가 공(公)과 사(私)를 제대로 분별하지도 못했다. 청군의 침략 소식을 제때 보고하지 않고 저항마저 포기함으로써 청군의 신속한 남하를 방조했던 김자점, 강화도 검찰사라는 감투를 자기 집안의 식솔과 재산을 보호하는 데 남용했던 김류와 김경징 등의 행적은 바로 그 상징이 된다. 인조는 그럼에도 김류와 김자점 등 공신들을 끝까지 편애하고 감싼다. 인조는 종묘사직을 도탄에 빠뜨리고, 수많은 백성의 생령들을 고통의 구렁텅이로 몰아넣은 그들을 처벌하려 들지 않았다. 하지만 청은 달랐다. 

그들은 전승국임에도 병자호란이 끝나자마자 과거 청산을 철저히 시도했다. 조선의 전장에서 과오를 저지르거나 태만했던 지휘관들을 가차 없이 군율로 가혹하게 처벌했다. 사정(私情)에 눈이 멀어 공신들을 끝까지 비호한 결과는 무엇이었던가? 훗날 인조 정권과 효종 정권을 뒤엎으려는 역모를 시도했던 심기원(沈器遠)과 김자점이 모두 공신 출신이었다는 사실은 너무나도 역설적이다. 1627년 1월 13일의 정묘호란과 1636년 12월 9일의 병자호란을 돌아보면 오늘의 역사가 바로 보인다. 1627년 정묘호란은 상대하기 버거운 청의 전면 침략을 미봉책으로 잠시 멈춰 놓았던 해였다. 하지만 이후 10년은 당연히 '외양간을 고쳐야 했던' 시간들이었다. 그러나 조선은 그러지 못했다. '개돼지만도 못한 오랑캐와 관계를 계속 유지할 수 없다.'는 총론의 목소리만 조선 조정에서 높았다. 그러나 조선 조정의 신료들은 침략을 막아낼 그 어떤 방도에 대한 각론조차도 만들어내지 못했다. 그 귀결이 처참한 항복이었고, 수많은 환향녀와 안추원, 안단 등을 만들어 냈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는 역사에서 제대로 된 역사적 교훈을 얻고는 있는 것일까? 병자호란의 치욕의 상징인 삼전도비는 지금 서울 송파구 석촌호수 롯데월드 옆 대로변에서 우리를 지켜보고 있다. 우리는 1997년 혹심한 IMF 외환위기를 겪었음에도 불구하고 지금 다시 우리 경제가 휘청대는 상황을 맞은 것을 보면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 1627년의 정묘호란과 1636의 병자호란, 1997년의 외환위기와 2012년 경제위기. 정치권력을 가진 사람들은 이 숫자들을 보면서 반드시 생각해야만 한다. 우리 민족의 처참한 역사를 두려워하고, 그리고 그 역사 앞에 무한 책임을 져야 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임진왜란으로 이어지는 양대 전란의 추위와 굶주림 속에 절망과 슬픔을 곱씹으며 청나라 심양으로 끌려가야 했던 수많은 선인들의 고통을 추념(追念)해야 한다. 

지금 우리가 처한 경제위기도 IMF 등 외환위기 등에 대한 원인 규명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정치권력 싸움만 하는 현 상황에서 비롯된 것이다. 병자호란(1636)은 10년 앞서 일어난 정묘호란(1627) 당시 조선에 주어진 과제를 제대로 해결하지 못한 뼈아픈 결과이다. 지금의 경제난국도  IMF 외환위기 때 책임 소재와 원인에 대한 규명이 부족했기 때문에, 이를 되풀이하고 있다는 것으로 볼 수 있다는 점에서 시사하는 바가 매우 크다. 우리는 비극의 역사인 병자호란을 되돌아보면서 과거의 잘못을 뿌리 깊이 성찰하지 않는다면, 위기는 언제나 반복될 수 있다는 교훈을 새삼 되새겨야 한다. 그리고 그 위기는 지금 찾아들고 있다. 수많은 민초의 죽음과 10만 명이 넘는 포로를 발생시킨 병자호란의 원인이 조선 지배층의 무능과 무책임에 있다고 볼 수 있다. 

정묘호란의 굴욕을 겪고도 이들은 명·청 교체기 급변하는 국제 정세에 신속히 대처할 방법을 강구하기는커녕 오직 책임 회피에만 급급했다. 위정자들의 이 같은 안이한 태도는 병자호란 이후에도 마찬가지였다. 인조는 청 태종에게 세 번 큰절을 하는 치욕을 겪었지만 잘못된 정책 판단으로 환란을 자초한 정책담당자들에 대한 책임 추궁은 소홀히 했다. 일례로 인조반정의 1등 공신인 김류는 아들 김경징의 안일한 처신으로 강화도가 함락돼 비난이 들끓는데도 자리를 보전했다. 반면 백성들의 고통은 극심했다. 청으로 끌려갔다 탈출한 포로들은 다시 청으로 끌려가 발뒤꿈치를 잘리는 혹형을 당했다. 안추원과 안단은 무려 28년, 36년 만에 탈출에 성공했지만 끝내 고국 땅을 밟지 못했다. 조선으로 되돌아온 포로 여자들(환향녀)은 가족에게조차 버림받았던 것이다. 조선은 청에 항복한 이후에도 오랑캐라고 혐오하기만 했지, 왜 당해야 했는지 알려고 하지 않았다. 

위기의 원인을 찾아 철저히 반성하고, 미래를 준비하는 자세가 결여됐던 것이 조선이 동아시아 3국 가운데 근대화가 가장 늦을 수밖에 없었던 이유이다. 우리는 위기가 닥쳤을 때 이를 확실히 극복하는 DNA가 부족한 것이 아닌지 다시 한 번 자성해볼 필요가 있다. 우리는 이제 밝은 미래사회를 만들기 위해서 병자호란과 같은 난을 다시는 당해서는 안 된다. 우리는 강대국 사이에서 생존의 방법을 모색해야 했던 조선의 운명이 수백 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변함이 없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때문에 현재 정묘·병자호란과 임진왜란에 대한 역사관을 다시 재정립하는 것은 과거가 아닌 미래의 밝은 역사를 여는 것이다. 우리의 강화도와 남한산성은 우리 민족의 과거 역사적 경험으로, 지금 현시대의 우리들을 살펴보고 있다. 그리고 한반도에 살아가는 후손들이여, 힘차게 새로운 역사를 쓰라고 외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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